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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삼천리에 다시 무궁화가 필 날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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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민정 작성일18-11-11 21:36 조회1,3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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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평양에서 많은 한국인들의 혼을 울리는 뜻깊은 선언이 있었다. 남측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측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9월 평양선언. 4월 판문점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봄바람이 9월 평양선언까지 따스하게 불러온 것이다. 이런 중대한 시기, 나는 한반도의 아픔을 보여주는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비무장 지대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의 현장에 다녀오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11월 7일, 사단 법인 ‘우리 민족’의 주최하의 전라남도 학생들과 함께하는 ‘청소년 DMZ 통일 캠프’를 광주에서 나또한 참가하게 되었다.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달려, 내가 처음 맞이한 곳은 서대문 형무소였다. 통일 캠프인데 어째서 일제강점기의 잔해인 서대문 형무소가 일정에 들어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분단이 외세에 의한 분단이었고 그 시초가 일제강점기에 있어서이다. 서대문 형무소를 둘러보았을 때 내가 느낀 점은 인간이 인간으로써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시구문과 고문실이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들게 해주었다. 둘 모두 우리 한민족의 독립의 의지를 꺾고, 인간이 인간에게 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일을 저지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형장에 있는 미루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깊었는데, 통곡의 미루나무라 불리는 그 나무는 사형장으로 향하는 독립투사들이 마지막 통곡을 쏟아내는 곳이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루나무는 미루나무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잘 자라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독립이 되던 날에 그 나무가 쓰러졌었다고 한다. 그 미루나무는 독립투사들의 한을 받아내며 겨우 버티다 독립과 함께 그 한이 해소되어 결국 쓰러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대문 형무소를 나오며 담당 선생님이 이야기 해주시길, 역사를 기억하지 못 한다면 결국 그 역사는 반복이 된다 하셨다. 나는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계속 상기하도록 다짐하였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오두산 통일 전망대였다. 이 곳에서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북한 마을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곳은 휴전선 중에서 비무장 지대가 가장 짧은 곳이며, 휴전선이 지나는 곳이 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겨우 강 하나 넘으면 북한이라고 한다. 그 강도 썰물때면 바닥이 드러나 걸어서 이동이 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가까운데 지금은 바로 가지 못하는 현실에 아직도 이 한반도는 여전히 차가운 겨울에 머물러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 캠프는 민통선 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캠프그리브스’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 곳에서 가벼운 저녁을 먹고 저녁 프로그램을 참여했다.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통일 캠프라는 명칭에 걸맞는 분단에 관련된 내용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대한 이야기 들었다. 여전히 피해자가 남아있고 가해자가 분명함에도 사과받지 못 하는 ‘위안부’에 관련된 내용부터 시작하여 영화 ‘고지전’으로 알아보는 백마고지 전투를 비롯한 한반도 전쟁에 관련된 내용까지 있었다. 그 중, 유독 우리의 마음에 기억에 남은 것은 - 우리가 싸우는 것은 누구일까. 적일까, 우리일까. 아마 전쟁과 싸우는 것 같다.- 이다. 이 대사를 통해 나는 이 전쟁이 무쓸모하고 의미가 없고 결국 전쟁은 모두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배우게 되었다.
이튿날, 우리는 노동당사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노동당사는 북한 노동당이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에 당사로,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2층과 3층이 불타 사라진 곳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외벽이 총탄 자국과 장갑차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실제로 본 그 곳은 수많은 총탄 자국과 허물어져 사라진 외벽들, 분명히 존재했을 3층의 바닥이 더 이상 없는, 그런 처참한 모습이었다. 전쟁이 얼마나 처참하고 격렬했는지 나는 그 건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전날,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가 된 백마고지를 다음으로 가게 되었다. 백마고지전투는 그 치열했던 전쟁에서도 심격했던 전투였다. 전투동안 떨어진 수많은 포탄들로 인해 나무가 다 사라지고 하얗게 재가 쌓인 그 모습이 마치 누운 백마와 같다 하여 백마고지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투가 진행된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차례나 바뀌었다고 하니 그 전투의 치열함은 내가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없었다. 전투에서 사망한 모든 전사자들을 기리며 올라간 고지의 정상에서 우리는 선생님께 진짜 백마고지는 우리가 올라온 이 곳이 아니라 우리가 올라간 곳 정상에서 바라보게 되는 고지라고 하셨다. 백마고지는 이제 우리의 군사 시설이 존재하여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백마고지를 멀리서나마 바라보며 우리는 남측이든 북측이든 그 전투에서 사망한 모든 이들을 기리며 잠시 묵례를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열쇠 전망대였다. 통일의 열쇠가 되겠다는 열쇠부대 안에 존재하는 전망대로 부대원분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 곳은 오두산 전망대와는 다르게 북측과 남측의 군사시설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층에는 땅굴을 재현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전망대 측에서 준비해논 영상으로나마 다양한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대신 길게 이어진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을 볼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잠시 들린 임진각은 민통선 밖에서 북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많은 이산가족들이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찾아오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곳에는 분단 전에 우리 남측부터 신의주까지 달리던 기차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외침을 안은 채 멈춰있다. 또한 임진각이라고 적힌 표지판에 이전 역은 서울, 다음 역은 개성이라 적힌 것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임진각 주위로 철조망 쳐져있었는데, 이 곳을 방문한 이산가족들이 그 철조망을 보며 가까움에도 만날 수 없는 이들을 그리워할 모습이 상상되어 나또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한반도에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왔으면 한다.
마지막 날, 우리는 개성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도라전망대로 향했다. 서울보다 개성이 가까운 그 곳은 캠프에서 다녀온 3곳의 전망대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되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유난히 맑은 날씨 덕에 우리는 개성공단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남측과 북측이 협력하여 만든 그 곳은 한반도의 평화의 씨앗이자, 앞으로 함께 갈 걸음의 시초이기에, 그런 곳을 우리가 직접 바라볼 수 있어 너무나 감명깊었다. 또한 북측의 기정동 마을과 남측의 대성동 마을 뿐만 아니라, 판문점까지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북측의 도시, 마을, 그리고 남북의 교류의 흔적인 판문점, 분단된 현실을 알려주는 남방한계선까지 볼 수 있었던 도라전망대는 그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 벅차오름과 슬픔과 민족의 한이 느껴졌다.
끝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남북출입사무소다. 우리가 갔던 그 어떤 곳보다 가장 북한이랑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개성공단이 가동했던 당시에는 하루에 800명 이상이 오가던 곳이었다. 이제는 하루에 몇 명만 오가는 곳이지만, 곧 공단이 가동된다면 예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게 되는 곳이 될 것이다. 사무소 직원분의 간단한 설명, 특히 우리가 북측을 향할 때에는 출국이 아닌 경계를 넘는다는 의미의 출경을 사용하는 이유와 그 출입경의 절차를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이후 실제로 출경과 입경할 때 오가게 되는 곳을 견학하게 되었다. 그 곳을 견학하며, 만약 종전이 되고 내가 북측을 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 곳을 견학이 아닌 실제로 오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꿈꾸었다.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길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였다. 수많은 것을 보고 수많은 것을 생각하고 수많은 것을 느끼며 나는 생각하고 다짐하였다. 미래의 꿈나무인 청소년들중 하나인 내가 안고가야할 통일의 과제는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언젠가는 해결해야하는 과제임을. 나는 그 과제를 반드시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 한반도에 다시 봄바람이 불어 삼천리 만방에 무궁화가 필 날을, 나는 그리며 캠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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